[스크랩] 김진섭「생활인의 철학」
생활인의 철학
김진섭
본문
철학을 철학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니, 왜냐 하면, 그만큼 철학은 오늘날 그 본래의 사명――사람에게 인생의 의의와 인생의 지식을 교시(敎示)하려 하는 의도를 거의 방기(放棄)하여 버렸고, 철학자는 속세와 절연(絶緣)하고, 관외(管外)에 은둔(隱遁)하여 고일(高逸)한 고독경(孤獨境)에서 오로지 자기의 담론(談論)에만 경청(傾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학과 철학자가 생활의 지각(知覺)을 온전히 상실하여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부단히 인생의 예지(叡智)를 추구하는 현대 중국의 '양식(良識)의 철학자' 임어당(林語堂)이 일찍이 "내가 임마누엘 칸트를 읽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석 장 이 상 더 읽을 수 있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논리적 사고가 과도(過度)의 발달을 성수(成遂)하고, 전문적 어법이 극도로 분화한 필연의 결과로서, 철학이 정치·경제보다도 훨씬 후면에 퇴거(退去)되어, 평상인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呵責)을 느끼지 않고 철학의 측면을 통과하고 있는 현대 문명의 기묘한 현상을 지적한 것으로서, 사실상 오늘에 있어서는 교육이 있는 사람들도, 대개는 철학이 있으나 없으나 별로 상관이 없는 대표적 과제가 되어 있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후략>
[작품개괄]
-작가 김진섭(1903∼ ? )
수필가. 독문학자. 호는 청천. 전남 목포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독문과 졸업. 귀국 후 경성 제대 도서관 촉탁을 지내고 광복 후 서울대 중앙 도서관장. 성균관대, 동국대, 서울대 등의 교수를 역임했다. 6·25 때 청운동 자택에서 납북되어 생사 불명이다. 수필집으로 '인생 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송춘(頌春)', '백설부', '모친', '교양에 대하여', '모송론', '주부송', '독서술' 등을 꼽는다.
-갈래 중수필
-성격 교훈적, 사색적, 논리적, 현학적
-출전 <생활인의 철학(1948)>
-문체 만연체
-제재 생활인의 예지
-주제 생활인의 예지와 통찰력 속에 빛나는 철학
-표현 만연체의 중후한 문체, 한자어(투)를 많이 사용한 현학적 표현
[작품 해제]
이 글은 먼저 철학이 필요 없게 된 현실을 철학자들의 측면과 생활 그 자체의 복잡 다단함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 문단에서 필자는 자신이 거론하는 철학이 학문적 철학이 아니라 삶에 대한, 혹은 사물에 대한 판단력과 통찰력임을 제시하고 모든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을 가져야 함을 역설한다.
일찍이 모든 이들은 자신의 일들에 몰두할 때 나름의 철학이 생긴다고 한다. 예컨대,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도 그 집에서 버리는 쓰레기의 내용물을 보면 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에 전력하면 삶의 철학은 저절로 깨우쳐지는 것이며,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현대인의 생생한 목소리인 책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을 선택이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가지는 목적 의식과 동일시하고 있다. 어떠한 일을 하는 것에는 반드시 그 나름의 철학적 선택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삶에 대한 예지가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 예지는 학식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삶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예지이지 지식의 양은 아님을 필자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은 철학이란 철학자의 전유물이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역전 시켜 일반인들도 자기 나름의 주체적인 철학을 가져야 한다는 작자의 생각을 논리 정연하게 전개했다. 생활의 예지가 생활인의 귀중한 철학이라는 선언을 하고 있는 이 글은 철학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관점을 제시한다.
사변적 논리적 학문적인 측면의 철학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부필부의 생활 체험에서 우러난 체험담 현실생활에서 나온 예민한 감각과 명확한 사고력이 담긴 부녀자들의 말에서 철학의 진정한 의미가 나올 수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작자는 철학이라는 용어를 예지, 신념, 지혜, 통찰력 등으로 변화시켜 사용하기도 한다. 내일에 대한 알맞고 바른 지향과 오늘에 대한 시각에는 평범한 듯 하면서도 예지에 빛나는 통찰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작자의 깊은 사색을 거쳐 나온 것으로 교훈적인 주제 의식이 나타나 있다. 즉,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 철학임을 강조하면서, 그 철학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윤기 있고, 개성 있게 해 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